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휴 이사금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신라]]의 제9대 군주. 칭호는 [[이사금]]. '''약 200여 년간 지속된 신라 초기 석씨 [[왕조]]의 초대 군주였다'''. 《[[삼국사기]]》의 기록에 의하면 [[석탈해]]의 [[손자]]이다. 아버지는 [[탈해 이사금]](제4대)의 아들 [[각간]] 구추(仇鄒)이고,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(只珍內禮夫人)이다. 박씨 마지막 왕인 [[아달라 이사금]](제8대)에게 아들이 없어 그가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.[* 그러나 《삼국사기》의 [[신덕왕]](제53대) 부분을 보고, [[교차검증]]하면 아달라 이사금은 [[후손]]이 없지는 않았다. 그래서 적자가 없었다는 의미로 추정된다. 신덕왕 박경휘는 서계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.] 탈해 이사금의 손자라고 하는데 《삼국사기》 기록을 적힌 대로 믿는다면 탈해 이사금이 서기 80년에 사망했고, 벌휴 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했으니 104년의 차이가 난다. 탈해 이사금과 석구추가 각각 [[할아버지]] 때 아들을 생산했다고 해도 너무 시간차가 크다. 일단 이 부분은 신라사같은 경우, 고고학적 연대와 《삼국사기》 연대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건 김씨 왕실이 확립되는 [[내물 마립간]](제17대)때부터로 여겨지며, 이 부분을 근거로 《삼국사기》 서술 전체를 불신했던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적 분석은 현재 와선 적어도 가계도와 기사 자체는 교차 검증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논파된지 오래이다. 그러므로 벌휴 이사금은 적어도 그 기년은 의문시되지만 실제로 탈해 이사금의 손자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.[* 왕위 계승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로는 누군가의 몇 대 손인 자가 누구의 아들이네 손자네 하는 식으로 계보 자체를 몇 단계 올린다는 얘긴,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그 전례가 없는 황당한 발상이다. 게다가 신라는 그 말기까지도 혈통에 대한 신성성이 컸는데 함부로 《족보》를 조작하거나 사칭한다면, 아예 재위 자체가 불가하다. 그 왕건과 견훤마저도 함부로 대놓고 고구려 고씨 왕실 및 백제 부여씨 왕실과의 연관성을 주장하진 못했다.] 일단 석탈해가 [[신화]]적인 인물이라는 성격이 있으나, [[유리 이사금]](제3대)과의 일화 및 3세기 초반부터 융성해져서 아예 [[사로국]]과의 문화적, 경제적 격차가 두드러지는 가야와의 대립도 개연성이 있기에, 석씨 집단의 신화가 아닌 실질적인 시조는 석벌휴가 아니냐는 설은 지금 와선 상당 부분 설득력이 떨어진 상태이다. 이 부분에서 그냥 넘길 수 없는 부분은, 벌휴 이사금이 즉위한 해가 [[혁거세 거서간]]과 똑같이 [[갑자]](甲子)년인 것이다. 하필 [[육십갑자]] 중 첫 번째로 연대를 끼워 맞추었다는 의혹을 받기 딱 좋은데 이는 김부식이 《삼국사기》를 편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라측의 기년 수정일 가능성이 높다. 벌휴 이사금은 모친이 김씨 족단 여자인 것으로 보아 즉위 과정에서 김씨 족단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. 그렇다면 이 벌휴 이사금의 왕비가 누구였는지 또한 신라사 초기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지만,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던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. 장남 골정의 아들들이 [[조분 이사금]](제11대)과 [[첨해 이사금]](제12대)이며, 차남 이매의 아들이 [[내해 이사금]](제10대)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